항공우주 이야기

챔피언과 도전자: 보잉의 우주사업 - Round 2를 준비하라

seanny boy 2023. 1. 20. 19:41

'위대한 기업, 창공의 제왕'

 

보잉이 위대한 기업이 아니면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여줄 수 있는 기업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항공기, 전투기, 미사일, 위성과 발사체까지. 하늘은 물론 카르마 라인 너머를 나는 것 중에 보잉의 족적이 새겨지지 않은 분야는 단언컨대 없다. 항공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우주개발 역사도 보잉을 빼고는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BUT...

 

'2등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만년 1등'

작년에 아르테미스 1호가 창공을 가르자 주변에서 묻는 사람이 많았다, 저것도 스페이스X가 쏜 로켓이냐고. 그 로켓은 보잉과 록히드마틴의 합작사, ULA가 만든 SLS(Space Launch System)이다. ‘현존하는 최강의 로켓’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로켓으로 스페이스X의 팰컨 헤비보다 무려 40%나 추력이 강하다

 

하지만 성공하기까지 보잉이 걸어온 길은 가시덩굴과도 같았다. SLS의 개발은 애초 계획보다 여러 해나 지연됐고 예산도 거의 40%나 더 들었다. 만일 NASA가 다른 프로그램들을 미루면서까지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난항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비싼 비용으로 인한 논란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업적인 우주선 스타라이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보잉이 첫 시험 비행이 실패한 뒤 원인 조사에 매달리는 동안 스페이스X의 크루 드래곤은 2020년 첫 성공을 시작으로 연달아 5번의 미션을 성공시키며 세상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작년, 3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스타라이너의 첫 도킹이 성공했지만... 우리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빛이 바랬다... 결국 보잉은 오랫동안 지켜온 * NASA 협력사 2위 (매출 기준) * 의 자리를 스페이스X에게 내줘야 했다

* 1위는 NASA와 반쯤 혈연관계에 가까운 Caltech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위 다툼이다 *

 

'강자의 딜레마'

사실 스페이스X와 비교당하는 것이 보잉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애초에 보잉은 우주가 주력인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6년, 보잉이 우주사업을 별도의 독립 사업부 (Networks & Space Systems)로 운영했던 마지막 해, 를 기준으로 그 규모는 약 * $7B * 에 불과했다. 당시 보잉의 전체 매출이 $100B에 육박했던 것을 감안하면 우주는 그저 '기타 사업' 일뿐이었다. 보잉의 To-Do 리스트에 우주보다 코로나와 B737 MAX 위기 극복, 드론, 친환경 비행기가 위에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이걸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다)

* 이후 우주와 방산을 하나의 간판, BDS (Boeing Defense and Space) 아래 모았는데, 내 검색력이 부족해서인지 순수한 우주 매출 규모를 찾진 못했다. 다만 정황 상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로 달 착륙과 우주왕복선의 영광을 기억하는 보잉 입장에서는 작금의 상황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우주개발의 파급력이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커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룰이 바뀌었다'

사실 이건 보잉뿐 아니라 항공우주 전통의 강자들이 모두 직면하고 있는 문제다 (단지 보잉이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일 뿐이다)

까다로운 인증, 품질 규정이 요구되며 투자도 많이 들어 '경쟁' 자체가 없었던 우주 시장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몇몇 대기업들이 배타적 지위를 누렸던 대형위성 시장은 작고 저렴한 소형위성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저렴한 비용으로 무장한 발사체들의 도전도 매섭다. 작년 스페이스X가 61회나 우주 궤도에 오르는 동안 ULA의 발사 횟수는 총 7번에 불과. 과거 보잉의 델타 로켓이 전 세계 발사 시장을 주름잡았던 시절은 이제 역사 속 옛이야기가 됐다

* 정보 홍수의 시대라 그런 걸까, 델타에게 왕좌를 물려받았다가 스페이스X에게 자리를 내어준 소유즈 로켓도 빠르게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

우주가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게임의 법칙이 바뀐 것이 원인이다

SLS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는 '현존 최강'이 아니라 '비싸다'는 것이다. 알려져 있는 SLS의 1회 발사 비용은 $4.1B (약 4조 원). 0이 실수로 더 들어간 것 아닌지 몇 번을 다시 보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참고로 NASA의 1년 전체 예산이 $25B. 이래서는 아무리 NASA라고 해도 심장 박동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좋아서 빨리 뛰는 것은 아닐 터)

반면 데뷔를 앞둔 스타십은 1회 발사비용이 $0.1B (약 1천억 원)라고 알려져 있다, SLS와는 반대의 이유로 0의 개수를 세어보게 만드는 숫자다. 물론 * 공식적인 발언 * 은 아니었고 '개발비는 빼고 계산'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그랬다고 해도 비교 자체가 민망한 차이다

* 스페이스X의 자신감이 아예 근거가 없다고 보긴 어렵다, 보잉은 SLS 개발 계약을 정산 기준으로 맺었기 때문에 비용에 대한 절박함이 상대적으로 덜한 반면 스페이스X는 확정가 계약(fixed-price contract)을 맺었기 때문에 비용을 방만하게 쓰면 망하는 구조다 *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부품도 기술도 설비도 다 가지고 있는 보잉이 가지지 못한 것은 아마도 '결기'일 것이다. 기존에 자신들이 해온 방식을 부정하기에 보잉은 지나치게 '위대한' 회사다. 새로운 규칙에 맞춰 다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비용, 사람, 모두가 숭배해 주었던 기존의 방식, 그리고 '1등이라는 타이틀'과 자존심까지)

우주사업은 기존의 공식을 더 큰 스케일로 더 정교하게 돌리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접근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록히드마틴과의 합작을 통해 만들어진 ULA

하지만 시장의 질서를 '와해' 시키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플레이어들은 강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돌연변이들은 더 싸고 합리적인 선택을 발견하면 거침없이 실천에 옮긴다. 발사 비용이 비싸면 정부에게 * 그대로 청구하던 선배들과 달리 스페이스X 도전을 선택했다. 심지어는 '재사용 발사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일론 머스크 발 앞에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다른 기업들도 '뉴스페이스 로켓'의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현기증을 호소하는 신세인 것은 다를 게 없다. 다만 보잉이 그동안 가장 많은 것을 이룬 기업이며 지금도 가장 많은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띌 뿐이다 (애초에 기대도 애정도 없으면 욕도 안 먹는다. xx사, xxxx사는 욕하는 사람도 없다)

'100년 쌓은 내공이 있다, Round 2 시작'

아르테미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새로운 사업기회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보수적인 '국방'도 뉴스페이스 기업들의 매력적인 (더 싸게 빠르게) 제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기존 플레이어들이 점점 초조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다양한 시도를 하려는 모양새다. 저가화 기술을 연구하고 조직을 날렵한 구조로 재편하는 등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온다. 사실 이들이 그동안 부진했던 것은 못해서라기 보단 안 한 것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를 간다 (물론 금연도 다이어트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긴 하다) 보잉의 다채로운 포트폴리오에 우주를 결합하면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Multi Domain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도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생산적인 경쟁을 펼치는 우주생태계를 원한다. 미 의회가 NASA에게 '아르테미스 달 착륙선 업체를 하나 더 뽑으라고 '권고'한 것도 이런 취지. 덕분에 * 스페이스X가 단독으로 선정되면서 상황이 종료된 줄 알았던 달 착륙선 프로그램도 다시 문이 열렸다*

* 스페이스X가 제안한 가격은 블루오리진의 1/4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제안을 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본선에도 들지 못했던 보잉의 가격은 알려져 있지 않다 *

* 블루오리진은 단독이 아니라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참여한다. 블루오리진, 록히드마틴, 노스롭그루먼 등이 멤버인 (이만하면 어벤저스가 부럽지 않다) National Team이 그것. 단독으로 참가했다가 떨어진 보잉은 이번엔 National Team의 멤버가 되어 SpaceX 다구리에 나설 예정 *

 

바뀐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더 나아진 모습으로 멋지게 '왕의 귀환'에 성공한 기업은 여럿 있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Microsoft). 이제부터 시작될 Round 2가 Round 1보다 더 긴박감 넘치는 무대가 되어 우주생태계가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